우리 삶에 연습이란 없음을...
숭례문과 조선왕조실록
600여년이라는 상상하지 못할 긴 시간 동안 한민족의 흥망성쇄를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내려다보던 국보 1호 숭례문이 관리 소홀/부주의로 인해 불과 수 시간만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한 순간의 방화로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국가의 보물을 바라보면서 나는 선조들의 '보존에 대한 집념'이 어린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린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1392년 즉위)에서 철종(1864년 승하)까지 25대 국왕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책이다. 조선왕조는 대대로 이 왕조실록을 종묘사직만큼이나 귀중히 여겨,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도성 내의 춘추관 외에 전국에 3개의 사고를 더 만들어 실록을 보관했다. 이를 외사고라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성주, 청주, 전주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실제로 이런 '리스크 헤지'방식은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실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성주와 청주 사고는 왜군에 의해, 그리고 도성 춘추관 사고는 백성들의 경복궁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전주 사고의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당시 전라감사 이광은 참봉 오희길에게 실록을 옮길 장소를 찾아내라 지시했고, 결국 내장산 은봉암에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전라감사는 이 일을 관리에게만 맡길 수 없다 판단하여 학문과 지혜가 있는 선비를 구했고, 선비 안의(64세)와 손홍록(56세)이 이 일을 자청했다. 이들은 실록을 일단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그곳도 불안하다 판단하여 다시 더 깊은 산중에 있는 비래암으로 옮겼는데, 당시 옮겨진 사료의 양은 태조에서 명종까지 실록 47상자, 고려사와 기타 서책 15상자로 도합 63상자였다. 그 때부터 참봉 오희길과 선비 안의, 손홍록, 그리고 내장사 승려들은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침번을 서며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해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한 질의 실록은 전쟁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후 전주본 실록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동안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아산, 해주, 묘향산, 강화도 등지를 전전하며 안전하게 보관된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이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다시 백업본이 제작되는데, 이 때 조선왕조는 두 차례의 전란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토대로 실록 사고를 길목이 아닌 깊은 산속에 위치한 암자에 짓게 한다. 도성 내 춘추관 이외에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정족산 사고가 그들로써, 이 사고본을 지키는 사찰을 수호사찰이라 일컬었다. (물론 이들 사고도 일제의 침탈과 동경대지진, 한국 전쟁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비켜나가지는 못했다. 왜란 후에 실록은 모두 5부의 백업이 제작되었으나 춘추관본은 소실,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소실, 적상산본은 북한에 약탈되고 현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만 남아 서울대 규장각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각각 보관 중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백업'만이 그 노력의 전부가 아니다. 실제로 단순한 서책 제작 과 분산의 차원을 넘어 고도의 관리체계가 실록의 오랜 보존을 뒷받침했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실록을 편찰할 때는 실록청이란 임시관청을 만들었다. '실록청 위궤'라는 것은 이 실록청이 남긴 '백서'로써 왕조실록을 제작 후 서고로 봉안하기까지의 전 과정 및 투입된 물자와 인원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들은 실록 연구자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치밀하다고 한다. 또한 사후 관리를 위해서 지방 서고의 실록들은 매 2~3년마다 꺼내 바람에 습기를 말리는'포쇄'과정을 거쳤는데, 그 때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전 과정을 직접 감독했다. 그리고 다시 실록의 보관상태를 소상히 점검해 '실록형지안'이라는 문서를 남겼는데, 그 책에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상세히 기록돼 있어 책을 따라 실록 제작 과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라 하니 놀라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선인들의 기록을 중시했던 전통과 상상 이상의 집념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물려주었지만, 정작 우리 후손들은 그 수많았던 전쟁통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나라에서 제일 가는 보물, 숭례문을 눈 앞에서 허망하게 잃어버렸다. 이는 어쩌면 옛것은 무조건 버려야 하고 무분별하게 새로운 것만 좇는, 우리의 선조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의 '오로지 앞으로만 고정되어버린 시선'이 빚어낸 화는 아닐런지. 우리는 단순히 문화재라는 껍질만 물려받았던 것이지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은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건 아닐까.
by chungsuk | 2008/02/11 15:08 | ▒ 생각 ▒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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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MH at 2008/02/12 04:13
좋은글 굽신굽신
Commented by chungsuk at 2008/02/12 05:28
답글 굽신굽신
Commented by 이지윤 at 2008/02/14 21:42
어쩜 이렇게 글을 잘쓰니.
Commented by chungsuk at 2008/02/15 07:32
지윤// 난 네 글솜씨가 많이 부럽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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